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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투데이안산

[임흥선 칼럼] 체일기행 (諦日紀行)(3)

  • 입력 2024.02.2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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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한국어교사/안산용신학교 교사
문해.한국어교사/안산용신학교 교사

 

체일기행 (諦日紀行)(3) 

교토의 혼노지(本能寺)는 필자가 평소 가장 와보고 싶었던 곳으로 드디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동상과 입정안국(立正安國)이라는 글귀와 마주했다. 소설 德川家康에 보면 남아인생 50년 돌고 도는 무한(無限)에 비하면 부질없는 것.....’ 16세기 일본 센카쿠 시대 영걸(英傑)로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평소 즐겨 부르던 야쓰모리의 한 구절처럼 49세를 일기로 이곳 혼노지(本能寺)에서 아케치미쓰히데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고 불같은 삶을 마감했다. 고금(古今)과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심복(心腹)에게 살해당한 사례가 많았는데 일본 역사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반역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매사에 철두철미했던 오다 노부나가가 천황을 만나기 위해 158261일 교토행을 하면서 휘하에 150명의 호위무사만 함께 간 것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오다 노부나가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거기까지였다.’ 소설에서는 노부나가의 부인 오히메(小姬)도 독사(毒蛇)라 불리던 사이토 도산의 딸답게 적과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는데, 사전(事前)에 부인의 조언(助言)만 들었어도 일본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 최초로 화승총(火繩銃)부대를 운용하여 칼에서 총싸움으로 전투의 게임체인저가 되고,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2천명의 병력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2만 병력을 궤멸시킨 용병술은 센카쿠시대 최고의 전사(戰史)로 꼽히는 등 무적무패(無敵無敗) 오다노부나가는 가히 전투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불교 등 종교를 가혹하게 탄압하고 사위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도쿠가와 노부야스를 죽인 사례는 등 노부나가의 통치는 한마디로 권력은 칼에게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냉혹했다.

이처럼 검()처럼 날카롭고 불같은 기질(氣質)로 센카쿠 시대(戰國時代) 절대권력자에 오른 오다 노부나가를 일격에 쓰러트린 인물이 바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였다. 아케치미쓰히데는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4대천왕에 오르고 서학(西學)에도 밝은 문무(文武)를 겸비했지만 다소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그가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를 반역(叛逆)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는데, 역시나 조용한 개가 주인을 문 것이다.

필자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혼노지(本能寺) 주변에 지금은 해자(垓字)도 없고 숲도 없고 덩그러니 사찰(寺刹)하나에 오다 노부나가의 유해(遺骸)와 비석 그리고 수백 기의 봉안묘만이 있을 뿐이었다. 부속건물로 노부나가 기념관이 있었는데 그가 사용하던 검()과 투구 그리고 갑옷 등 이었다. 일본인들이 뽑은 가장 좋아한다는 역사 인물 1위인. 오다 노부나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가 후세에 남긴 정신적 유산(遺産)은 침략과 무자비한 공격본능이 아닐까?

혼노지의 변()으로 아케치 미쓰히데가 정권을 잡은 기간은 고작 삼일천하(三日天下)였는데 당시 쥬코쿠의 모리와 대결중이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광석화처럼 군대를 움직여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궤멸시키고 난세(亂世)를 평정(平定)한 후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수십만의 군사와 논공행상(論功行賞)의 탈출구로 가도정명(假道征明)이란 해괴한 책략으로 16세기 후반 동북아 정세는 그야말로 급변하게 된다. 그러니 혼노지(本能寺)의 변()’이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變曲點)이 되는 셈이다.

테라 마치(寺町) 거리에 큐쿄도(鳩居堂)’라는 서예 용품 전문점에 잠시 들렀다. 상점 내부는 서예 용품 백화점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제품을 구비하고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세필(細筆)로 직접 글을 쓰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누구에겐가 선물에 동봉할 감사 편지를 쓰는 듯했는데 한자의 필체가 유려(流麗)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컴퓨터로 인쇄하면 간단한 업무일 텐데, 이런 게 일본인들인가?

두 무리의 유아들이 견학을 왔는지 손에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노란색 유니폼에 반바지 차림도 눈에 띄었다. 모자의 모양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모자와 비슷했다. 아직도 그들이 말하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에 미련이 남아있는 걸까?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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