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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서지문 고려대 영문학 명예교수 '남은 수명에 비례한 투표권?'

  • 입력 2023.08.09 17:00
  • 수정 2023.08.0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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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 고려대학교 영문학 명예교수
서지문 고려대학교 영문학 명예교수

 

남은 수명에 비례한 투표권?

 

내가 우리나라 헌법을 초안하신 법학자들에게 개인적인 은혜라도 입은 듯 감사하는 이유는 그분들이 남녀 공히 성인이면 모두 투표권을 갖는 보통선거’(universal ballot 또는 universal suffrage)를 건국헌법에서부터 보장해서 여성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처럼 참정권을 위한 길고 험난한 투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녀 모두 나이나 학력이나 재산 신분 기타 어떤 조건과도 상관없이 행사한 한 표가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 평등선거를 보장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법은 민법과 상속법 등의 많은 조항에서 여성에게 불리했지만 여성은 투표권으로 남성과 동등한 시민임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호주제등 수많은 여성차별 법과 제도를 시정하기 위한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우리가 선망하는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미국과 유럽에서도 보통, 평등, 비밀 선거를 쟁취하기 위해서 몇 세기를 남녀 공히 필사적인 투쟁을 해야했었다. 민주주의의 선봉장이었던 영국도 18세기까지도 투표권자가 소수였고 각 지역의 대지주나 그가 지명하는 사람이 단독후보가 되기 일수여서 선거는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았다. 이 상황에서 무수한 민중이 국민헌장운동’(Chartist Movement)을 일으켜서 1830년대와 40년대에 전국 각지에서 연일 대규모 시위와 행진을 벌였고 세 번이나 보통+비밀선거, 선거구의 인구비례에 따른 재획정, 피선거권자 재산요건 폐지등을 요구하는 200만명(당시 영국 인구의 1/10)이 서명한 탄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렇게 많은 국민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으나 영국에서 모든 성인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1884년이었고 선거권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여성들이 반세기 이상의 필사적 투쟁의 성과로 모두 선거권을 갖게 된 것은 1930년이었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건국된 나라라고 할 수 있지만 애초엔 남성들만이 투표권을 가졌다. 여성들은 100년 이상 목이 쉬도록 참정권을 요구해서 20세기에야 쟁취했고 노예들은 참혹한 남북전쟁을 통해 해방되었으나 여러 주들이 흑인들이 소득이 낮아서 인두세를 면제받는 점을 악용해서 투표권을 박탈해서 오래고 격렬한 민권운동으로 쟁취해야했고, 반면에 백인은 죽은 자도 계속 투표를 하는 주()도 있었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석사공부를 할 때 한 교수는 자기 할아버지는 사망 후에도 투표를 했는데 그것은 망자(亡者)가 죽은지 얼마 후 까지는 후손들이 그가 누구에게 투표했을지를 안다는 이유로 후손들이 대리투표를 하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얼마나 여러 주에서 얼마나 오래 실행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유럽의 나라들도 각기 국민이 선거권자, 즉 나라의 주권자가 되기 위한 투쟁의 쓰라린 역사가 있고, 스위스의 마지막 주(canton)에서 여성참정권이 대법원판결로 인정된 것은 1990년이었다. 바로 우리 이웃나라 북한과 중국에서는 국민이 아직 제대로 된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고 지구상의 반 이상인 저개발국가들에서 선거는 국민을 농락하는 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나라의 국민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 얼마나 부럽겠는가?

 

그런데 선거부정이 일어나지 않는 진성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치가들이 국민의 표를 매수해서 국가가 점점 멸망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일이 일어난다. 다수의 중남미의 나라들이 밤낮으로 공짜파티를 열어 주겠다는 포퓰리스트 후보를 선출했다가 화폐의 가치가 휴지보다 못한 나라로 전락했다. 우리나라도 바로 6년 전에 그런 선택을 한 탓에 최저임금이 높아서 기업이 고용을 못하니 실업률이 치솟고 노조는 거스릴 수 없는 민주주의의 신이 되었고 탄소배출이 없는 원전을 억지로 폐기하고 환경과 국가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주는 태양광, 풍력 수력 화력 발전을 확대해서 전기료는 계속 오르면서 수급불안은 계속되고, 치수를 위해 수년에 걸쳐 수천억원을 투입해서 설치한 4대강 보()를 어거지 평가로 해체해서 국민을 자연재해에 내몰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우리 국민은 모두 김정은의 정신건강을 밤낮으로 기도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우리는 지난 70~80년에 걸쳐 이룩한 탄탄한 국가 인프라가 부서지고 무너져서 마치 안전장치가 망가진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꼴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더불어민주당의 혁신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자기 중학생 아들 말을 인용해서 남은 수명에 비례해 투표권을 배당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성의 발언의 근저에는 여러 가지 전제가 깔려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모두 이기적 동물이어서 자기가 죽은 후에는 세상이 망해도 상관하지 않기에 살 날이 많이 남지 않은 사람은 경솔하게, 심지어는 심술궂게, 투표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둘째는 살 날이 많지 않은, 그러니까 나이가 많은 사람은 늙은 사람에게만 유리한 사회를 만드는 투표를 할 것이라는 전제다. 셋째는 노인들은 어리석어서 국가대사를 그르치고 나라를 기울게 할 후보에게 투표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만약 이 세 가지 가정이 이치에 맞는 가정이라면 나이든 사람의 투표권은 제한하고 아예 박탈해야한다는 논리도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가? 몇 천만 투표권자 중에 누가 현명한 투표를 할 것이라는 기준은 없다. 다만 지혜는 나이 순이라는 것은 공인된 진리는 아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경륜의 지혜를 상식으로 인정한다. 우리나라가 투표권을 남은 수명 비례로 조정한다면 제 2의 홍위병 사태로, 민주주의를 모독 한 나라로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기성세대의 노력으로 이룩한 번영의 열매를 누리는 청년세대가 민주화운동, 시민단체(운동), 노조운동 등으로 기성세대의 권력을 잠식하며 나라의 인프라를 모두 장악했다. 이제 경륜이 있는 세대의 투표권마저 박탈해야 청년세대가 안심하는 세상이 온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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